낳아준 엄마

1994 –  1975 – 1976 사이 내가 막연하고 불확실한 때의 나의 집이었던, 이 고아원에서  나의 1년간의 봉사가 거의 끝날무렵이다.

나를 낳아준 엄마를 만나기로 한 meeting 에 대한 그날의 일들은  수정처럼 확실히 내마음에 기억된다.   월요일에  언니(고아원에서 아는 큰 언니중의 한 사람인데, 이 곳에서 원장으로 일함)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언니는 전화를 받았는데, 아주 심상치 않고, 중요하다고 여겼다.    언니는 급하게  말하길 나의 생모가 나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했다.   나는 정말 어리벙벙할 지경으로  놀랐다.   나의 전 생애, 지금껏 살아오면서 ,  나의 생모는 돌아가신줄 믿었고,  난 아버지손에서 자란줄 알았다.   이 것이 내가 나의 부모에게 해드린 얘기고,  지금껏 내가 믿고있는 사실이다.   어린 6살 아이의 생각으로는 엄마를 잃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잘 이해가 안됐고, 또 여러 어른들이 내가 엄마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음을  오만가지 이유로 얘기해줄때, 그것을 믿는것도 힘들었다.

자라면서, 난 나의 생모와  생부를 찾는것을 절대 원하지 않았고,  그것은 어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낳아준 부모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것이 없어도 절대적으로 만족하고 사는 입양자중의 하나였고, 확실하지도 않은 추측을 해서,  찾을려고 노력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은,  나를 위해, 한국인 입양자로서의 정체성과 나의 문화적 유산을 되찾으려 애썼지만, 나의 혈통과 가문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24시간 이내에, 나의 생모가 생존해 있고, 그녀가 3번씩이나 사설 탐정을 구해서 나를 찾으려했음을 알아냈다.   나의 생모는 21년간이나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나의 생모와의 만남에 대해 어떻게 해야할지, 나의 부모에게 물었을때, 만약 그들이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면, 이런 일을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부모는 정말 기뻐서  나의 생모와의 만남을 정신적으로 격려해 주었다.  나는 2틀 동안이나 어떻게 해야할지 모순되는 감정때문에 안개속을 걸었다.  전혀 이런상황을  확실히  정리할수없는 상태였다.   내가 전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딸을 찾으려고 계속 노력한 이여자를 위해 만나야 할것이라 느꼈고,  내가 다시 또 한국을 올 기회가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만나기로 했다.

같은주 수요일에,  난 냄새나는 생선이 있는 복도를 걸어서 3 층에 있는 방에, 두 여자를 보며 앉아 있었다, 나의 생모와 그녀의 여동생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이러한 모든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랬다.   난 정말 이 방에서 쏜살같이  바깥으로 뛰어나가 안도의 숨을 쉬고 싶었다.   우리는 열망적으로 기대하는 어떤 사실을 얻기위해  부자연스럽게 앉아  또 한 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나의 생모는 나의 옆에 앉아서 조용히 다른 곳을 쳐다보며 말하길, “아니예요, 이애가 그애가 아닌것 같아요.”   그런다음 , 나의 다리에 상처가 있느냐고 물었다.   왜그래요, 네, 있어요!   나는뜨거운 다리미로 인한 화상으로,  다리에 연한 갈색의 상처가 있다.    난 항상 이것이 고아원에서 생긴것으로 믿어왔다.   나의 이모는 눈물을 터뜨리며, 이 상처가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서 생겼다고 하며, 넘칠정도로 내게 사과하였다.    이모는 그녀남편의 셔츠 다림질을 막 끝내고, 내게 너무 가깝게  앉지말라고 했다.  어쨌든 난 가까이 앉았고,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줄 알았지만, 내 스스로 화상을 입고, 그래서 상처가 생기고,  아무런 할 말이 없다.   이 이야기를 나의 부모이외는 아무에게도 한적이 없다.  이것은 마치 눈에서 베일이 벗겨지듯 선명해 졌다.  나는   갑자기 이 두여자가 다르게 보여졌고,  나의 손을 잡고 내 옆에 앉아있는 이 여자를 잘 보려고 했다.   나의 손은 정말 그녀의 손과 닮았다.   난 그녀의 발을 보았다 – 우리는 같은 size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했는데, 둘이 같은 모양의 귀를 가진것을 알았다.    그녀는 내게 반지를 주었는데,  내게 꼭 맞았다, 그 반지는 언젠가 내게 주려고그녀가 계속 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자가 나와 관련이 있음을 알았을때, 그 깨닳음이  말이 없이도, 나의 가슴속에 아직도  완전한 평정으로 남아있다.

일주일후,  난 이복 남동생을 만났다, 그는 거의 내가 남자같은 모습을 바꿔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우린 금새 좋아하게 됐고,  둘다 환경의 피해자들이다.   그래서 지금 난 남동생이 있다!   친척들도 만났다.  나는 정말 존경하는 나의 할머니도 만났다.    난 나의 할아버지의 사진을 갈망하듯 보고,  그의 눈을 응시하면서, 오래전에 어렴풋이 본것을 기억했다.  주체할수 없는 감정에 술을 마시고 취한 삼촌과도 전화로 통화 하고, 그는 나의 얼굴을 맞대고 보기위해  찾아왔다.   내 마음은 정말 혼란이었다.  난 이 시간 내내,  줄곳 모든 친척들을 기억하려고,  또 나에 관한 그들의 모든 이야기를 기억하려고, 내게 일어난 것들에 대해 그들의 여러 생각을 나누는 것을 기억하려고, 나의 머리는 깨질것 같았다.  아무것에도 내가 연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난 나의 생모를 위로하기위해 계속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녀 엮시 조용했다.   그 순간, 난 나의 노년의 내 자신을 그녀를 통해 보았다 –  극성스러움, 그녀는 차분하고 수수했다;  다른 사람이 주목을 받을때, 그녀는 사라진다.   내가 이런 경향을 그녀로부터 받은 것일까도 생각해 본다.   이 방문의 마지막에, 난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정말 그들을 모두 기억하지 못해서 진심으로 미안하고,  절대적으로 중요한 이  찰라에 기억을 잘 못해서 어찌할수 없는 죄송함과 수치함을 느꼈다.   이들이  걱정어리고 진지한 태도로, 조카를 다시 찾고, 손녀, 딸을 다시 찾은 것을 감사하는  가족들을 볼때, 나도 그들처름 함께 그런 마음가짐으로 동참되기를 빌었다.    난 정말 그들에게 말 하수 없는 슬픔을 느꼈고, 나 자신에게는 실망됐다.

그 주말은 나의 생모와 함께 보냈다.   나의 생모와의 만남에서 4 가지의 기묘한 주요 순간들이 꼬투리에 쌓인채 있다.   첫번째,  한국에 있는 동안, 그녀와 함께 지내고, 우리는 함께 잠을 잤다.   그녀의 냄새는 마치 Olay 오일 같이 향기로웠다.   난 그 냄새를 기억하고 있고, 왜 내가 지금까지 그 향의 로션을 선택해 얼굴에 바르는지  잘알고있다.   그 날은 정말 잠을 곤히 잘 잤다.    두번째,  내가 목욕을 하고있는데, 나의 생모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때를 밀어주고 싶어했다.   나는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라고 했다.   그녀는 날 보고 싶어했다, 나의 전부를.   나는 수치심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한것을 안다.    셋째,  그녀는 내게 한 박스 가득 김을 만들어 주었다,왜냐면 내가 김을 좋아한다는 것을 들었고, 나를 앉히고 내가 아침을 먹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나의 미국 생활에 대해서 듣고 싶은가 하고 물었다, 그녀는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우리는 서로 아무것도 얘기할 것이 없었다.   넷째, 그녀는 바닥에서 문을 등지고, 학교에 갈  내 동생의 셔츠를 다림질하고 있었다.   나는 문지방에 앉아서 무슨일이든 엄마를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주 조용히 말하길, 내가 너를 마지막 본것이 네가 3살 어린애였는데, 지금 네가 다큰 숙녀가 되서, 그녀는 이 다큰 아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처절히 엄마에 대해 가슴아팠다.

그 주말동안에, 나는 어느 입양자든지 다들 꼭 알고 싶어하고, 의문스러워 하는 질문을 했다.   왜?   왜,  당신은 날 포기 했나요?   나는, 날 절대 버린것이 아니고,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정말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별도로, 나는 나의 생부에  대해, 그의 얘기를 들은 적이 없고, 그는 이미 돌아가셨다.   이것은 나의 생모의 얘기다.    나의 생모와 난 그 당시 상황과, 법과 , 사회 관례의 피해자였다.   나의 생모는 그녀가 24살에 나의 생부를 만났다.   그는 여나므살 엄마보다 아래였는데, 나의 생모를 계속 쫒아다녔다.  그들은 그의 군임무를 마치기전에 결혼했고, 그녀는  어린 나와 함께 생활했다.   나는 나의 생모와 그녀의 가족과 함께 성장했는데,  그래서 나의 조부모, 즉 그녀의 부모에 대한에 대한 기억이 있다.   나는 사랑을 받았고, 춤과 노래를 하고, 그리고 지금은 기억할 수 없는 친척들과 놀던 기억이 있다.   맨 마지막으로, 내가 그들의 집에서 보낸 시간이 머리속에 몇가지 기억으로 내 마음속에  현명하게 사진을 보듯 남아있다.    자동차의 창문이 닫히고,  나는 떠나면서,  나의 조부모님에게 울면서 잘있으라고 손을 흔들던 것을 기억한다.  사실은,  나중에 이 기억의  두사람이 나의 생모와, 할머니였던 것을 알았다.   이런 확실하고 또 혼란스러운 기억이 아직도 날 괴롭히고 있다.  나의 생부가 군대에서 제대후 돌아온후 그는 더 이상 나의 생모와의 결혼생활을 원치 않았고, 이혼후 바로 나는 그와, 그 가족에게로 갔다.  그 당시 한국은 이혼하면, 아이는 아버지 쪽에 보호되는예 였고, 아이를 볼 수있는 방문도 허락이 안되고, 함께 부모가 합동으로 아이를 보호하는 법도 없었다.   어쨌든, 나의 생부는  비열한 사람은 아니였고,  나의 생모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그녀는 2 번 정도 나와 함께 할 수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이러한 방문도 곧 없어질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면 나의 생부는 말한대로  약속을 철저히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인생에 새 여자가 생겼고, 그 여자는 생부에게  모든것을 어렵게 했다.   나의 생모의 마지막 방문은 재래시장에서 였는데, 엄마가 내게 빨간 구두를 사주셨다, 그것은 내 나이에 비해, 내게 너무 큰것이었는데, 내가 졸라서 엄마가 마지 못해 응해 주셨다.   이것이 내가 세살 반되던때, 그녀의 나와 함께한 마지막 기억이다.

그 얼마후, 나의 생모는 나의 생부에게 찾아와 날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했는데, 그녀는 더 이상 나의 생부가 날 데리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몇달간의 수소문과 적어도 3개정도의 그녀가 알고있는  어린이의 집 을 찾아가, 나의 고향인 인천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의 어느 고아원에  내가 있음을 알아냈다.   그녀는 몇번이나 고아원을 찾아와 나를 돌려달라고  부탁했으나, 고아원 직원은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녀는 급히 서울에 달려와, 고아원의 원장을 직접 만나기 위해 몇시간이고 기다렸다.   그찰라,  몇가지 소식을 들을수 이었다 – 내가 입양으로 보내졌다고.   그녀는 내가 엄마에 대한모든 것을 다 잊었노라는 말을 들었고, 그냥 엄마 자신의 인생을 살라는 말을 들었다.   나의 생모는 내가 미국으로 입양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사설 탐정을 고용하여, 내가 유럽에 있는지를 알아보게 했다.   그녀는 가사일로  돈을 모아 21년간,  3 사람의 다른 탐정인을 고용하였다.    어쨌든, 고아원에 연관된 어느 인자한 스님이 , 그동안 나의 미국 부모님이 보낸  편지와 사진을 계속 나의 생모에게 알려주고 연락하고 있었다.   나의 생모는 내가 학교생활을 잘하고, 내가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대학에 가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고아원에서 일할때, 그것이 그녀의 나를 찾는 마지막 노력이었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정말 찾았다.   난 이런 편지를 써준 스님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녀의 행동은 친절하면서도 몰인정했지만, 난 나의 생모가 해준 모든것에 감사한다.

이런 나의 얘기를 하나하나 짜 맞추는 것이 도전이었다.   하지만, 나의 어린몸은  날 낳아준 엄마를 잊지 않았다.   입양되지 않고 다 성장한 고아들을 만났다.   그들은 날 기억했고, 내가 엄마로부터 떨어져 고통속에, 매일 울었던 그 당시를 떠올리며,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지금, 난 편안함을 느낀다.   그들은 내가 울보아기 였다고,  고아원의 누군가가 꼭 보살펴 주고 달래주어야 울음을 그쳤다고 했다.   어떤때는  나도 이런것을 잊고 있지만,  어떻게 나의 머리로 하여금,  나의 전 일생에서 나와 함께있었던 이 여인을 잊을수  있을까, 난 여전히 난처하게  당황하고 있다.

2 thoughts on “낳아준 엄마

  1. 하이 조이!!
    한국어 실력이 오히려 나보다 더 낳은 듯 !
    쉽지 않는 이야길 하느라 힘들었을 것 같지만 이런 얘기조차 이제는 듣는게
    지겨워하지 않을까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너의 용기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냅니다.

    from your pseudo-korean-treacher !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