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나이가 얼마가 들었든간에, 모든 여성은 그녀의 엄마가 거울앞에서 단장하던것을 지켜보던 때를 기억할것이다.   난 나의 엄마의 변화하는 모습  – 그녀의 밝은 파란눈을 더욱 선명히 두드러지게 속눈섭에  마스카라를 칠하던 것을 지켜보곤 했다.  연보라색이 그녀가 즐겨쓰는 립스틱   색깔이었고, 그녀가 돌아보며, 립스틱을 내게도 좀 발라주면, 내가 “성장한 소녀” 처럼 느끼게 해주던 그 순간을 나는 기다렸다.   내가 화려하고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그 색채조합에 대하여  어떤것을 알았는가하면, 연보라색은 나의 창백한 황녹색의 아시안 얼굴엔 좀 약한 색으로 진짜 어울리지 않지만, 아이리쉬-독일계의 나의 엄마의  힌 피부엔 정말 완벽하게 잘 어울렸던것을 알았다.

Make-up은  사실  모든 유색인종의 여성들에게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은  기억으로 생각나게 하는 하나의 통과의례 이다.    완벽하게 볼연지와 쉐이드를 하고, 립스틱과 가장 새로운 유행의 머리를 정성드려 치장하고,  당당히 학교에 오던 그 백인 소녀들을 우리는 모두 기억한다.    결국 어쨌든 Seventeen 잡지에서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우리같은 다른 소녀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스스로 알아내야 했다.    알람을 한시간 먼저 맞추어놓고, 우리의 곧은 스트레이트 머리를 컬을 만들어, 이것이 잘 고정되어 있도록하고, 보라색 아이세도우로  우리의 눈을 좀더크게 보이게 하려하거나, 아니면 충분히 더 잠을 자, 세도우을 하지않고, 길게 풍성하게 늘어진 머리를 올려서 쉽게 재빨리 포니테일의 머리로 만든다.    예의를 갖추려고 누군가와 다른 견해를 갖고있는 모든여성들,  치장을 정성드려하지만, 그들 자신이 엉터리 흉내에 불과하고, 계속해서 예뻐보이도록 시도했지만, 다른 사람과 별로 다를바 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그런 여성들에게 존경을 갖고, 그래서 우리들중 많은여성은  make-up을  시도하는것을 거부했다.   시니어 프럼, 졸업반 무도회보다 더 심하게 엉망으로 과장하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의 엄마가 핑크 볼연지를 나의 볼에 바르려하고 – 나는 시종 얼굴 화장의 큰낭패를 피하려고 얼굴을 바깥쪽으로 밀어부치듯 엄마의 볼연지를 피하려던 무지막지한 장면을 떠올린다.   한편, 나의 여동생들이 가세하여 몇시간씩 거울에 붙어, 그들 스스로 화장하는데 자신들을 정말 못생긴 중국인형처럼 보이게 만들어 놓았다.   그때는 우리가 이런것을 분명히 알지 못했는데,  이 모든 복숭아 크림색깔들은 우리가 그렇게 원하는 아름다움을 만들어주는 대신, 오히려 우리의 다른점을 더욱 더 지나치게  강조해보이게 하는것을 알게됐다.

왜 내가 make-up을 피하는가?  내가 거울을 보고 있으면, 내가 보고 사람을 알아볼수 없기 때문이다.   이 make-up이 나의 엄마의 아름다움을 두드러지게 하는 반면, 이것이 내겐 가짜같은 느낌-과 허실같은 모습을 만든다.   나는 이 “ 약간의 적은 색깔”이  나의 사회적 일에 거의 도움이 되지않음을 잘 알고 있다, 특히 내가 알고있는 백인 남자분이  한말이 계속 집요하게 나의 머리에 남아있는데, 그는 “내가 생각하기엔, 아시안 여성, 특히 한국여성이 가장 아름다운것 같다, 그런데 난 한사람과도 데이트를 해본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Make-up을 하지 않으면, 그문제는 없어진다.   그래서 나는 확고부동하게 반대의 입장에서, 나를 위한 진실한 남자는 진정한 나를 보아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나의 20대 내내, make-up은 마스크를 쓴 기분 같은것이였다.   얼굴에 무엇인가 바르는것이 불편하므로, 이런 make-up은 단지 나의 불편함을 더 증가시키기만 한다.   이런 나의 거부가  한 입양어머니로 부터 그룹의  한국입양인  여성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glamour girl” 파티, – 이들 어린 아시안 입양소녀들에게 make-up에 관하여, 또 헤어와 손톱에 대하여 가르처주고, 한편  그들을 리본과, 반짝반짝 윤기나는 립스틱을 바르며 몸치장을 해주는, 그런 모임을 주최하는 것을 요청받을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파티는 어린 소녀들에게 자신감을 북돋아주는 어떤 계기가 되었어야하는데, 결국 뜻밖의 것이 되었다, 아하!, 우리들 다성장한 여성들을 위하여.  처음으로 우리는 거울을 뚜러저라 보며, 우리가 아름답구나 하는것을 분명히 말할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친교를 통해 우리 여성들이 함께 나누는 것이 우리의 내면의 아름다움이, 이런것이 우리를 품위있게 만든다는것을 확실히 알았다.   이 뜻밖의 사실이 우리에겐 놀랄만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궁극적으로, 자신만의 피부색의 편암함은 받아들임과 관련이 있다.   받아들임은 우리들 있는 그대로의 일괄적인 것, 사회적 상황에 따른 요소들, 그리고 이런것이 우리의 깊은 자신만의 의식이 우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준다.   우리는 늘 우리들 엄마의  아름다운 하늘색, 녹색, 아니면 갈색의 눈을 갈망하고, 금발이나, 적갈색, 아니면 굽실굽실한 머리를 동경한다.   그러나 엄마와 딸의 모습이  닮지않은 것의 걱정이 가족간의 깊은 유대관계에 상관없는 비교가 되며,비록 모습은 닮지않았지만, 내면이 닮은,이런느낌이 특별한 우리들만의 것이다.

몇년전에 입양가족잡지에 글을 썼다.  이글을 다시 새롭게 좋은 방식으로 다듬어야한다, 왜냐면 마지막 절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생각엔 이것이 정말 좋은  시작의 이야기 거리이지만, 결코 결과는 없다.  아직 화장을 자주 하지 않는다. 솔직히, 이것은 한시간동안의 엉망진창의 상태이다.  Make-up카운터에 계속 관심을 갖고 싶지만, 난  향수나, 향이 있는 것에 관심이 끌린다.  아마도  향은 이것을 볼수 없고, 단지 이것은 본질적인 에센스이기 때문일거다.

Oprah Speak

나는 열열한 Orprah Winfrey의 팬이다.  나는 그녀의 25회 씨즌의 모든 에피소드를 항상 고대하면서,  빠짐없이 도취되고, 감명받고, 눈물을 자아내며 이런 감정으로 보았다.  만약 여러분이 그녀의 말을 충분히 시간을 갖고 듣는다면, 당신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잘 알것이다.   그녀는 뭔가 계속해서, “여러분이 있어야할 곳에 당신이 올바로 있는거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나의 동료 입양인들이 입양이 문화적 말살이라고 이야기하며, 때때로 입양에 관한일을  다른 방식으로 하거나, 다시하거나, 입양을 모두 그만두라고 요구할때, 그들에 관하여 생각한다.   나와 나의 어메리칸 드림들을 깨닫고, 측은히 여기지만, 확실한것은,  이런것들이 아직 완전히  그들이 주장하는 것에 분명히 다 동의할수 없음을 느낀다.    이말은 내가 나만의 힘겨운 고뇌들이나, 배신,  억제하고 참는것들, 그리고 모든종류의 갈등, 문제들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난 정말 이 모든것을 다 극복할수 있었음을 진정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내가 느끼기에 난 아주 심각할 정도의 어려운 상황이 아니였던것 같다.    난  그들을 이해하지만, 전적으로 동의 할수 없다.  내 생각엔 난 이렇게 태어난것 같다.

내가 미국에 입양되기전, 그곳을 집이라고 불렀던, 나의 고아원, 한국에 있는 그 고아원에서 일년간 발렌티어로 일을 한 때가 다시 생각난다.   아이들이 어떤 의견을 요하는 질문을 받으면, 난 그들의 대답을 기대하지만, 아이들은 으레 하는 말이 있은데- 그냥 이라는 말이다.   나의 해석이 별로 안 좋지만, 사전에 의하면 이것은 “ 그저 있는 그대로”이다.   이말은 당신이 계획을 세울때라는가, 누가 어디를 가든 별로 상관하지 않을때, 어떤것에 대하여 자신의 강한 의견이 없을때 주로 사용하는데, 이경우는 “뭐, 그런것이 인생이지” 하는 의미로 말한다.   맨처음 나의 반응은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의 대답인지 믿기지 않는 놀람이며 좀 화가났다.   그냥 있는그대로, 이게 무슨말인가!  그러나 시간이 가고, 난 “그냥 있는 그대로” 란 말의 의미를 진실로 알게 되었다.    이것은 포기나 굴복이 아니고  확실함이며, 잘난체하지 않는 평화스러움이다.  이 아이들은 입양이 전혀 안될경우이거나,  그들의 친부모와 전혀 다시 만날가능성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의 상태는 보이지 않는 열등한 이류의 시민들이었고, 이것이 어떤 후회나 화를내는 자격조차도 박탈한 상태다.

수년간,  여러분 모두 잘 읽어서 아시겠지만,  나는 이젠 모두 성인이 되었고, 그들자신의 가족을 갖고있는 이 아이들과 계속 연락해왔다.  아직도 난 이들과의 관계에서 기쁨과, 재미와 축하할일이 있고, 또 그들중에는  자질구레한 불평도 있다.   우리같은 해외의 입양인들이 자주 못하는 것을 이들은 서로서로  노력해서 구하고, 또 우연히 찾는다.   내가 문화의 심연성을  잃어버린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그들을 재촉해서 그들의 생각이 어떤지 얘기하라고 하면, 그들의 대답은, 그냥 어니/누나 라고 하며, 나에게 예의바르게 조용히 하라고 하며, 이 토의에서 아무런 극적이나 인상적인  나눔이 없는것에 좀 무안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진실로 내가 있어야할 곳에 내가 올바로 있는거라면, 입양된 일이 그냥 삶의 한 부분이었나 보다.  이 일이 일어 나기로 되어 있었는지?  오늘 나는 약간 내자신이 존재하는  특별한 느낌이다.   그냥.

백인이아닌다른유색인은버스의어디에앉았었나?

최근에 The Help라는 책을 읽었고, 그리고 영화도 보았다.   어린 아이들을 돌보면서 책을 구해  끝까지  다 읽는것이 무척  호사스런 재미었고,  이 두가지를 다 할수 있었음에 두배의 즐거움을 가졌다.    난 두명의 다른 엄마들과 갔었는데, 한명은 South African의 백인이고, 다른 한명은 미국인 백인엄마였다.   평상시에는 그들의 인종이 그들의 신분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나의 친구인 C와 S인데, 둘다 최고로 훌륭한 멋진 여성이다.   이 경우에는, 누가 자동차안에 있었는가를  알아내는게 중요하다.   질문을 했다 “ 그 당시에 당신이 살았다면 당신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들의 허심탄회한 솔직한 대답을 듣는것이  대단히 재미있었다.   난 그들이 그 당시로 돌아가서 자란다면, 이런 인종에 관련된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에 관하여, 그들의 전통적인 관습에 도전하려는, 열렬한 적극적인 태도에 경외감을 느꼈다.

난 다른 여러가지 의문에 쌓이게 됐다.   “ 그 당시로 간다면 난 어떤 행동을 했을까?”  분명히, 나의 아이들을 돌보아줄 흑인유모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 만약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내가 그 당시에 정말 존재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은, 그 당시에 한국 입양인들이 있었음을 아는데,  한국전쟁의 고아들을 구한다는 “구호”아래 대부분 독실한  신앙인 가족들에 의하여 1950경에 큰 그룹으로 떼지어 한국 입양인들이 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들이 상점에 가는것이 허락치 않은 1970년대 와 1980년대 남부지방에서 성장한 한국입양인들을 만난적이있는데, 그들은  남부지방의 처음나온 국기를 두려워했으며,  트럭가득 백인남자 아이들이 차를 몰며 거리를 미친듯 빠르게 운전하는것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Jim Crow시절에 우리는 어디에 있었는지?    ( Jim Crow는 실제의 인물이 아니고, Thomas Dartmouth “Daddy” Rice에 의해 불린 음악인데,  Rice는 백인인데 흑인얼굴로 분장 하고 이 노래를 부름.   Jim Crow란말은 인종차별법이나, 관습등에 사용해왔었다.  )

지금까지 얼마간 이 의문은 나의 머리속을 어지럽힌다.    나의 아들이  학교에서 Martin Luther King에 관하여 배우고, 아주 달라진 모습으로 매료되어 집에 왔는데, 그는 유색인종 – 황인종, 아주 검은 유색인종, 밝은색의 인종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하였다.   나는 실제로 그가 자신을 백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Harlem 지역을 통과하여 운전해 가면, 이 주변에 백인들이 없기에 그가 만약 여기서 있으면서 놀아도 될는지 그는 물어볼것이다.   그러나 늘 나의 아시안 어메리칸 역사에 대하여 생각하고, Jim Crow 시절에 우리는 미국역사책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느낄때,  난 어떻게 해야할지 답을 모르겠다.   우리가 존재했었음을 나는 안다.   그 이전에는  유색인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려고, 아시안 여성들이 미국에 이민오는것을 금지 했던 법률이 역사책에 있었다.   중국인 이민자들도 역시 완전한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았었다.   광산에 들어가는 “아시안 남자”가 들고있는 카나리아새의 이미지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보여주는 것이 나의 머리속에서 영원히 잠재할것이다.

그래서, 난  우리의 아들들에게 입양과 미국에 거주하는 아시안사람으로서, 이에 관해  교육시키는 아주 중요한 임무를 띠었다.   다른 어떤 소수민족의 사람들처럼, 우리집은 Asian American 저자들이 쓴 많은 책들이 있는데, 또 한국에서 온 사진들과 그림들이 벽에 걸려있고,   나는 우리아이들에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외에 누군가를 찾아서 한국말을 가르쳐주어야하는 아직  끝나지않은 탐색중에 있다.  나의 아이들은 모든 인종의 친구들과 가깝게 어울리고 있다.   이것만으로 족할까?   난 어떤것이 그들의 머리와 가슴, 즉 이성과 감정에 남아있을지 생각에 잠겼다.

끝으로,  나는 책 하나를 찾았다.  Partly Colored: Asian Americans and Racial Anomaly in the Segregated South  http://www.new.wisc.edu/18551.  어느누구든 이에 관하여 관심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인가 찾았습니까?

8월 16일

입양된 날, 비행기를 타던날, 기념일, 그리고  내가 가장덜 좋아하는, Gotcha Day….. 그날 우리는 고아원에 왔고, 그날 우리는 가족이 되었고,  그래도 상당히  일년중 가장 최고로 축하하는 날이 되었다.   이런날을 무어라고 부르던간에, 이날은 우리가  가족이라 부를수 있는  작은 구룹에 속한날이다.  이날은 나의 여동생과 내가, 간단한 전화로 조용히 기억하며, 오직 우리 둘만이 영원히 함께 나눌수 있는 날이다.   어릴적에는, 난 이날을 아주 좋아했다.   이날이  두번째 생일같이 느꼈졌고,  더 좋게, 더 특별하게 여겼던것은, 아마도 엄마께서 이날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날같이 호들갑스럽게  다루었기때문이었다.  나의 엄마를 아는 분은,  이날이 굉장한 날이라고 말할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니, 이날은 파티도, 축하연도 없이,  나의 여동생과 나, 우리 서로가 가족으로서 선언하고, 확언하는 날이 더 맞는 느낌이다.

올해도,  이날이 별로 다름없었다.  전화해서, 멧세지를 남겼다.  잘했다.   하나 예상치못한 것을 제외하고.

가족을 방문하려  잠시 떠나있었는데, 기술의 마력으로 나의 전화가 한국의 모든지역에 간단한 text message로 연결된것을 알았다 – “안녕하세요??”   CYJ였는데,  내 고아원의 “어린 남동생”이였다.   그는 늦게까지 일하고 있어서 시간이 틀렸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난 정말 놀라고 반가움에 감격했다.

CYJ는 teenager로서, 내가 OHK(나의 고아원)에서 일하고 있던해에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를 마쳤다.   그는 항상 뭔가 특별한것이 있었고, 그래서 나는 그를 미국에 나와 함께 데려오려고까지  노력했었다.   그의 어머니같은 존재인 큰누나도 그가  “일생의 기회”를 얻기를 바라며, 미국에 갈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 오는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17년간 우리는 서로 연락을 했다.  매번 내가 한국을 방문했을때도, 전화해서 만나도록 노력했다.  고아원을 떠나야 할 나이가 다가옴에따라, CYJ는 다른 17살의 남자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건설현장에서 일하면서,홀로서기를 시작했다.   그는 다행히 이미 나이가 들은, 큰 누나가 있었고,  그래서 거주할 곳이 있었다.   돈은 없고, 단지 일할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마침 알맞은 때에, 그는 컴퓨터기술을 익혔고, 지금은 디자인 회사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나는, 그의 여자친구의 가족이 그가 “고아”였다는 것을 안후 그와 결별한 그의 여자친구를  만난적이 있고, 지금 현재 그의 사랑인 여자친구와의 사진들도 보았다.   정말 귀엽다.  매번 우리가 만날때마다, 그는  나를 방문하기위하여 미국에 올거라고 하며,  어쩌면 한국을 떠나는 것이 좋을것 같다고 얘기한다.   만날때마다  난 그에게 조금의 용돈을 주며, 우리의 다음 만남을 지키기 위하여 사랑으로 포옹해준다.

CYJ는 허심탄히 소리내 잘 웃는 친절하고, 상냥하게 말하는 젊은이다.  그러나 그는 전형적인 한국남자이듯, 조용하고, 말없이 좀 내성적이며, 그의 지난 인생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하여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다른 친구들에 대하여 –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누가 결혼을 했는지, 누가 아이를 갖었는지, 또 누가 크리스찬이 되었는지 등등….. 이 모든 중요한 일들을 내게 다 알려준다.   그는 이 구룹의 사진들 – 스키여행, 소풍, 저녁시간의 만남등의 사진을 내게 보여준다.  불행히도, 난 다른 친구들을 만날기회가 없었다.   그들과의 연락이 두절됐다.

기본으로 거주할 집이 없는 아이와  17년이란 세월을 연락하고 지낸것은 긴 시간이다.   우리는 둘다 주소가 바뀌거나 이메일, 전화번호가 많이 변경될때마다  미안한 마음이였다.  그러나 매번, 그는 날 어떻게든 찾았고, 그래서 이 text가 정말 놀랍고 기뻤다.   난 한국어를 쓸수 없고, 그의 영어는 썩 잘하지 못하지만, 난 바로 그가 동창회같은 모임을 기쁘게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8월 16일, 그는그의 누나와, 그녀의 딸과 함께  또 다른 가족같은, 무리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OHK로 가는 중이였다.   매년 8월 16일, 그들은 이렇게 한다.  그들은 고아원에 다시 와, 아직도 그곳에 남아있는 아이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얘기하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는 그들의 이름을 빠르게 줄줄 얘기했는데, 꽤 긴 리스트었다.   그들의 어린 얼굴의 스냅사진들이 내 눈앞을 스쳤다.   아마 난 더이상 그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와 얘기한것과 그들에게 나의 이메일과, 전화번호를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8월 이날이면 지금 나의 고향이된 이나라에 내가 도착한 날임을 인식하고, CYJ는 오직 그가 집이라고 부르는 그곳의 “가족”과 함께함을 안다.  이날이 의미하는 바가 지금은 훨씬 더 깊다.   두개의 , 정말 다른 가족의 순간이 이 세상 정반대의 극과 극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괴롭고도 즐거운일이다.

몇몇의 그들로 부터 소식을 듣기를 바란다.   조만간에 한국을 다시 가야할것 같다.

 

평범하지않은목요일

우리의 아파트를 팔아주고, 새아파트를 사는데 도움을 준 부동산 에이전트를 안다.  그녀를  알고있는이래, 그녀는 짐싸는것을 도와주고,  집을 고치는 사람을 구해주고,  전화하면 바로 그날로 오는  배관공을 찾는 것을 돕고, 게다가 우리 마루의 부분을 다시 고치는 나무를 골라서 가져다 주는것도 도와준다.   그녀는 평범하지 않은 부동산 중개인이다.   그녀는 공교롭게도 한국인이며,  나를 그 지역의 한국엄마 그룹에 초대하였다.   그녀는 꽤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상당한 네트워커이고, 이 주변지역에서 한국에 관한 모든것을 잘 알고있는 사람이다.   19명의 엄마와 거의 40명 정도의 아이들, 이들 개개인에 대하여 이 중개인은 다 알고 있다 – 그녀는 그들의 집을 팔거나, 사거나, 아니면  새로 수리하는데 도와 주었다.   모든것이 다 한국말로 하는것이 아니고, 또 맛있는 음식도 제공될거라는 언질을 주며, 꼭 참석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난 그날 오후를 음식과 나의 두 아들과 함께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그들은 어떤것이 정말 큰 거래인지 이해하지 못하는것 같다.  더구나, 왜 꼭 한국엄마들만의 모임인지?   그들은 내가 한국인이였음을  상기시키고, 난  그들에게 “사실상, 난 한국인이지만,  때때로 나의 마음속은 내가 한국인이 아닌것 같은 느낌”을 갖는것을 상기 시켰다.   Korean American인 나의 아이들은, 소년의상태인, 한국인인 것 같지만 아닌, 단지  그저 아이들이다.   토론의 여지가 없다.   이 방문이 나를 놀라게 했음을 시인한다.

나는  방안 가득 한국 엄마들과 아이들과 함께할때, 이런순간처럼  날  놀라게하고,  어색하게 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처음 한시간은,  내가 이곳에서 나가는것이 어떨까  정말 심각하게 생각했다.   소개할때 첫 문장을 말하는것이 고작 전부 영어이고, 그다음부터는 사라졌다.   결국 나는 7학년생과 이야기를 했고, 친절하게도 그애는  나와 조금의 대화를 했다.   “어른에 대한 존경”에 관한것이 아시안 지역사회에서는 아직도 상당히 존재하는 풍조이다.   늘 확실히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며, 그들은  예의없이 그냥 나갈수 없다!

나머지 엄마들은 부엌에서 그동안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새로온 사람들은 금새 친해졌는데, 같은 언어이기에 함께 즉시 하나로 될것이다.   아이들에게  모두 먼저 음식을 주었고, 그렇게 많은 그룹의 손님을 그녀의 집에 초대해 잘 처리하는 대단한 집주인 여인에 대하여도 이야기를 해야한다.   한국여성들은 재빨리 손님을  잘 대접해온것을 아는데, 이것은 정말 믿을수 없을만큼 대단했다.   당연히 음식도 아주 맛있었다 – 비빔밥과 김치도 있었다.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돌아가면서 자신들을 소개했다.   이들은 내가 부끄러울만큼 대단히 모두 잘 성공한 여성들이다.  선생님들도 있고, 음악가들, 예술가들, 미용사들, 사업가들, 금융계 사람들, 의사들이다.   내가 확신하건데, Korean American이 되려면, 당신은 40이 되기전에 반드시 2가지의 전문경력을 가져야 한다.  내가 알기로는  Full time 부모로서 이 나라에 온  엄마들일지라도, 전문적인 경력의 직업을 우선으로 갖는다.  난 나 자신을 소개할때, 나의 한국성만을 말하고, 나의 입양사실에 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언제 우리가 미국에 왔는지에 대해 물었고, 또 무슨이유로 여기에 왔는지 얘기하게 되었다.   아뿔싸, 내가 입양되었다는것을 얘기해야만 한다.   나의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난 이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전혀 모른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의 오만한 부분의 내면은 꺼리낌없이 대담하기를 원하여, 이사실을 훈장단 베지처럼 털어놓으라는 심정이었다.  이것은 어쩐지  분위기를 휘저어 불편한 는낌을 만드는 그런 반항적인 느낌이었다.    난 이 여성들이 만약 나를 수치스럽거나, 어떤 죄의식, 아니면 슬픔으로 처다볼것인지,이들이  어떤 얼굴을 할것인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 난 그들중의 한사람, 오직 자녀와 함께한 한국엄마로 있고 싶었다.    만약 내가 이 순간을 잘 모면할 것인지 보고 싶었다.  그런데 내 앞의 한 여성이 모든것을  뒤바꿔 놓았다.   그녀는 영어로 말하길, 여기서 태어나서, 오직 그녀만이 한국인인 곳에서 자랐고,  이 모임에 초대되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고 이야기 했다.  잘했다, 내가 그다음 차례 이다.

나는 몇몇 여성의 이야기를 듣는것이 무척 힘든 것을 예리하게 느꼈다.  아이들은 모두 우리들 주변에서 떠들며 놀았고,  몇명의 엄마들은 따로 자기들만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방안은 뚜렷한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찼다.   그러나 “나는 입양되었다”고 말하자, 갑자기 방안이 핀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만큼 조용해졌다.   “오오” 나 “아아”의 감탄사를 불러일으켰고, 다음엔  내 인생에 대하여 놀라움을 자아냈다.    오늘 모임의 여주인은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하려는중이며, 그녀의 아이는 몇달후에 집에 올 예정이다.    그날 오후의 끝자락의 시간에, 한국의 아이를 입양하기 원하는두명의 엄마가 내게 문의를 했고, 세명의 다른 여성들의 형제들은 이미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했다.   이런 일이 있을수 있을까?  방안의  거의  20%정도가 개인적으로 입양에 관하여 관련되어 있었다?   입양에 관하여  정말 많은 기쁨과 놀라움이 있었고, 부끄럽다거나 슬픔은 없었다.   물론 습관적이거나  통상의 질문들이 있었지만, 거기엔  동정심같은 것은 없고, 오직 환영뿐이었다.

그래서, 난 다시 좀더 조사를 해서, 그들 그룹을 위한 강의에 초대되어, 한국입양의  현상황에 관한것과, 한국의 고아원들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정확히 예상했던대로, 대부분의 여성들은 헌신적인 크리스찬들이었고, 그들은 한국을 위해서라면 무언가 그들이 할수 있는한 열심히 배우려하였다.   오직 지각력이나  인지도를 바꿀수만 있다면 나는 이일을 하겠다, 그리고 한국의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을 위하여 뭔가 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계속 전력을 다해  추구하고 있는 입양의 다음 세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말한것에대한실천

“아이들이 부모에게 애착을 갖는것이 그들의 몫이 아니고, 오히려 아이에게 애정을 갖고 돌보는것이 부모의 본분이다” – Rtaddonio

내가 처음 “adoption professional”의 여정을 시작했을때, 나는 성인 입양인 기관에서 자원봉사를 했고, 방금 새로 입양부모가된 부모들에게, 그들이  “좀더 나은 육아”를 할수 있도록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함께나누기 위해 여러곳을 여행하였다.   나눔의 중점은 어떤것이 더 효과가 있고, 어떤것이 실패하는지 그들에게 알려주고, 다시말해서  본보기로서 장래를 위하여 입양부모들에게  조언을 주었다.   부모가 내게 와서 말하길, 그들의 아이도 나와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는 보모도 있었다.   이런것이 내가 선물을 그들에게 주듯, 날 자랑스럽게 했다.   난 정말 하찮은 풋나기 였다!   보모가 되기전, 난 어드바이스를 물처럼 아주 관대하게 그냥 주었다.

지금은 엄마이며, 아이들이 보금자리에 와 함께 한다.  계속 지난 몇년간 많이 요구하는 것은 부모가 그들 아이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순수한 사랑으로 그것을 어떤 관점으로 수용하므로서, 이것이 나를, 내가 어떤것을 하겠다고 말한것을 단호히 실행에 옮겨야만 하게  만든다.   몇달전, 나의 아이학교의 한국엄마로 부터  한국문화모임을 도와줄수 있은지 묻는 전화를 받았다.  나의 아이들의 성이 한국인것이 나도 그들중의 하나로 비춰진것 같다.

해야할 임무는?  어머니들 그룹이 선보일 예정인 한국부채춤을 배우는 것이다.   난 꽤 열심히 몇년간 춤을 추었으니, 그래서 어떠한  춤이든  다시 출수 있는 기회를 가진것이 아주 흥미로웠다.   이것을 모두 한국말로 하는것이 좀 불안했지만 기대되었다.  이이들을 보며, 말하길 내가 무엇인가 함께 참여한다는것이 그들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만들까?  분명히 그렇다.   난 내가  어떤것을 사인했는지도 모르고 좋아서 두발로 껑충 껑충 뛰었다.   2달동안, 우리는 매주 적어도 2시간씩  춤을 연습했다!   춤을 가르치는 선생은, 그녀 자신도 엄마이고, 한때 한국에서  전문적인 고전무용가였으며, 오직 한국말로만 가르쳤고, 그녀는 우리의 머리에 머리핀이 어느자리에 꽂아야하는것에서부터 춤을 추는 자세까지 완벽하게 하라는아주 냉혹한 요구했다.   재미있었지만, 무척 힘들었고, 귀찮았고, 외로웠으며 이것을 해내서 정말 무척 기쁘다.

난 말을 나눌 진정한 친구를 아직 만들지 못했지만, 해야만 한다면 이 엄마들에게 전화를 할수 있음을 나는 안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조심스럽게  많은 호기심을 안보인다.  그들은  나에게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난 그들에게 그들의 아이들과 꼭 같이 한국말과 영어로  뒤범벅으로 섞어가며 대답한다.   정중한 예의갖춘 관계였다.  아마 이것은  직업적인 것에서 생기는   호기심이었지만, 내가 생각하기론 내가 한국 사회에서 그들에 대해 부질없는 남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아웃사이더인 사실이 더 맞는것 같아서, 그들은 아주 재미있는 방법으로 내게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 그룹이 아니였다.   난 내면의 금지된 세계로 들어갈수 있는 허가를 받은 는낌이었고, 그들은 많은것을 함께 나누었다.    첫번째로, 난 그들이  태어날때  가진이름을 물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한국여성들은 일단 그녀들의 아이가 생기면,  거의 좀체로 그들의 정식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간단히 그녀의 제일 큰애 아이의 엄마로 불리게 된다.  영원히.   이것이 내겐 더 쉽게 그들이 누군였는지에 대해 아는데 도움이 되지만,  뭔가 개인적인것을 물어보는것이  내가  좀더 많은 질문을 할수 있게 허용한다.   누가 어렸을때, 또는 어른이 된후에  미국에 왔는지, 왜 왔는지 알게 되었다.  또 누가 결혼해서 들어왔는지, 아닌지도 알게되었다.   누가 일을 하고있고, 일을 안하고 있는지 알게되었다.  그들의 부모와의 자연스러운 관계에 대하여도 알게되었고, 누가 그들의 엄마와 매일 이야기하는지도 알았고, 또 그들이 시댁에 대하여 정말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게되었다.

그 두달간이, 내가 원하는 만큼 나는 그들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내게  의례적인 한국말로 얘기했고, 다른이에게 하듯  같은 식으로 인사 했고,  많은 다른 한국엄마들이 아주 잘하듯 나의 아이들을 이뻐하며 좋아했다.   그들과 함께 했던것이 좋았지만 기진하게 지쳐버렸다.   끝날무렵에는 한국엄마로서의 잘 적응이 잘 안됐고, 이 모든것이 다 끝났을때는 정말 기뻤다.    우리의 춤은 대 성공이었다.   아직도 몇몇의 부모는 이것에 대해 열심히 격찬한다.   나의 아들은 태권도시범을 보였고, 한국노래도 배웠다.  그는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의 모든 반 친구들은 그가  훌륭하고 멋지다고 여겼다.   무대에 있는 그를 바라보는 것이 정말 굉장한 기분이였다.   이런 것이  그때의 그런 순간이었음을  기억한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모든 입양엄마들이 이런 것들을 한것 같다.   내가 나의 입양부모와 전통 한복을 입고, 젓가락으로 힘들게 음식을 먹고, 그들의 입양자녀의 모국문화를 모두 배우기위하여 참석했던 많았던 모든 문화의 날들과 구정축제들을 생각했다.   솔직히, 그당시에는 난 우리 부모가 좀 창피했었고, 왜 그렇게 열심히 배우려고하고, 참석하려하는지 의문이었다.   지금 엄마가 되고서, 누군가를 정말로 진심으로 사랑하면, 당신의 사랑으로 자신을 난처하게 하는것도 스스로 물리치는 사랑을 보여준다.

이것이 나의 전 수퍼바이저이며/상사가  계속 기회가 될때마다 인용한 말이 생각난다 – 아이에게 사랑을 주고 애착을 갖는것이 아이들이 할일이 아니고, 부모님의 역활이다.  그래서 난 즉시 겸손한 “감사” 의 말을 그동안 나의 좋은 지도자로서, 또 친구로서 내가 엄마노릇을 잘 해나갈수 있게 해준 몇분의  입양부모들에게 썼다.   나는 그들에게,  솔직했던것과, 그들의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래서  진정 진심으로 그들이 난처했던것과, 자주 그런 미처 생각조차못할 상상할수도 없는  그런 사랑을 보여준신것에 대하여 감사하였다.    이런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다.

내가아이였을때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생각하고, 아이처럼헤아렸습니다….

….. 내가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  고린도 1서 13:11

한국어로, 입양된 사람을 의미하는  마지막 부분의 단어는 영어로 직역하자면 ‘아이’ 나 ‘아기’ 이다.    겨우  바로 최근 12년간, 아마  더 적게,  입양인들은 “입양인”- 성인으로서,  스스로의-정체성을 가졌다 .   여기 미국도 역시, 입양된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야할지에 대해 논쟁이다.   어떤이들은 “어른 입양인” 이라 부르는것을 선호하고, 다른이들은 “입양된 사람”이라 하거나, 아니면 “입양인”이라고 한다.  나는 “어른 입양인” 이라 부르는것을 좋아하는데, 이것이  다른것보다 결국 덜 한정된 느낌이고,  난 입양되었던것이 아니고, 입양됐고 이 사실을 절대 잊지 않을것이다.   이것은 입양된 사람을 부를때 , 어떻게 표현해  부를것인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많은 입양인들이 왜 그렇게 우리의 신실한 삶을  발견하는것이 힘겨운지 진심으로 알것같다.    우리들중 많은이는,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를 입양한 성인들에게 본질적으로 이식되듯,  즉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우리가 믿듯, 이런것이 정말 우리가  독립하거나, 성장하거나, 어른이 되는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한다.

누구의 아이라고 인식되어지는 것이 늘 묘한 기분이다.   어는순간  입양인이 어른이 됐다고 여기고, 그리고 그녀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야할 때가 됐다고 얘기해줄때 그 책임을 받아들일수 있을까?  언젠가  난 뉴욕시에서 있던 한국의 날 퍼레이드에서  자랑스럽게 나의 젊고, 어른이된  입양인 친구들과 걷고있던것을 기억한다.   한구룹의 할머니들이 작은 한국 국기를 흔들고 있었는데,  이들이 몇몇의 아이들이 그들의 백인 미국인 부모와 함께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 할머니들은 곧 이 아이들이 한국에서 입양온 아이라는것을 알았다.   그들은 아이들의 손에 웃으면서 국기를 쥐어주기 시작했고,  동정어린 연민으로 혀를 끌끌찾다.   나는 한 할머니에게 닦아가서, 한국말로, 저도 하나 갖고 싶다고 하자, 날 놀란 눈으로 보며, 할머니들끼리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 너는 정말로 크구나!” 라고  말했다.  그들은 깜짝 놀랐고,  그들앞에  많은 한 구룹의 입양된 사람들 -어리게는 9살부터 많게는  30대까지의 입양인을 보고 눈물이 글썽거렸다 .   그들에게는 이 아이들이 실제로 성장해서 어른이 된것이 좀처럼 실감을 못하는것이다.   이 상황이 그런 순간이었다,한국이  50여년의 입양역사를 갖고 있는 지금도, 입양아 라는 그 말이 우리가 지금 누구인지, 거의 나이를 먹지않음을 반영하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날 생각에 잠기게 한다…..내가 믿기론 오직 우리같은  구룹의 사람들만 늘 어린아이로 언급하고 있고,  영원히 우리의 부모 – 나아준 부모와 입양한 부모와  서로 얽히게 연관된다.  당신의 입양 상황을 누설하고,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질문들은, 당신이 생각을 했던, 안했던간  나아준 생모를 찾았는지에 연관이 된다.  바로 잠시후, 당신은 분명 아주 훌륭한 부모를 갖고 있을거라는 극도의 칭찬을 들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생각이지만, 당신은  당신의 입양부모와의 관계에 대하여 아마도 힘들고 복잡했거나, 아니면 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당신의 생모를 찾는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하며,  당신이 어떤것을 부정하는것처럼, 모든관중을 혼란스럽게 보이게 했다고  시인한다.   입양된것에 대하여 적절한 감사가 없거나,  친가족을 못찾은것에 대하여 그만한 걱정이 없다면, 이것은 당신이 이런 문제에 처한것 같다.

내가 어른으로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입양되지 않은 나의 많은 친구들이 얼마나 그들의 엄마/혹은 아버지, 다른나라들에 있는 형제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겨우 일년에 한번, 혹은 두번정도의 만남만을 갖고, 가까운 관계를 갖고 있지 않음을 알고 매우 놀랐다.  이런것이 내가 정말 열광적인 자매라는 소리를듣거나, 나의 삶에 이젠 무관해야할 엄마와 정도  이상으로연관되는것이 어찌할바를 모르게 하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일임을 알았다.   죄가 아니고, 단지 단순한 사실이다.   그래서 난  왜 내가 나의 가족과 나의 감정에 대한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히려, 내가 왜 나의 가족과 나의 감정, 느낌을 나누며, 적극적인 관계를 갖기위해 어쩔수 없이 강요되는 느낌을 받아야하나?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나의 부모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가,  또  입양기관에 대한 좋지않은 발언을 하면, 말할 필요도 없이,  나와 같은 입양인들이, 누구나 다 그들의 가족과 별로 특별한 관계가 없는  다른 모든이와 별로 다를게 없어 보인다.

입양의 세계에는, 늘 아이와 아기에 대한것이다.  다큰 아이들이 가정을 필요로 한다는 광고는   좀체로 보기어렵다.   장래의 입양부모될 사람이 찾아와 8 살된 아이를 원한다고 말하는 부모는 극히 드물다.   프레젠테이션이나, 워크샵, 기사, 사진등 … 은 항상 아이에 관한, 아이들의 것이다.  난 가장 성공적인 입양후-프로그램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9살 까지 이며, 그리고 여기서 끝난다.  가끔 만약 당신이 입양된 아이들이 나이를 먹고 성장한 입양부모를 입양행사에 초대하면, 그들은  아직도 자기들이 입양부모 명단에 있음이 모욕당한것처럼 정말 대단히 화를 낸다.  이런 전문적인 분야의 사회복지사로, 입양인으로, 그리고 입양분야의 일을 하는것이 아직도 희박하지만, 난 끊임없는 문제, 곤경에 부딪친다.   나의 친구들,  그들자신들이 아이를 입양한후, 이 전문분야에 들어온,  대부분의 입양부모들인데, 난 끊임없이 그들 자녀들의  반영으로 지켜보고 있다.   난 또 때때로  느끼는데, 그들의 가설에 공범자이다: 누구의 아이이며,  딸이라는 것이 가장 편안한 나 자신인 것이 정말 때때로 매우 더 쉬운것을 안다.

이러한 것이 날 우리 입양인에 관하여 생각하게 한다.   이 구룹의 입양된 사람들은 절대 어른으로서 언급되지 않는다.   어떤 순간에 우리의 어린아이같은  것들을 버려야하고,  책임을 지는 어른이 되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들을 갖고 있으며,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우리 스스로의 인생 여정을 갖을까?  나의 몇몇 친구들과의 어떤 실망이  어린아이같은 모습으로  모두 이해하며, 그들이 원하는 그들만의 방법으로 인생을 갖을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오직 우리가 어른이 되고, 배우는것은 인생이 절대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가질않고, 삶은 그냥 가는것이다, 계속 움직이며, 절대 멈추지 않는다.

얼마나 이것이 귀찮은 느낌이 들던간에, 난 이말들을 사용할것을 주장한다 “입양인” 이라고.    난 한국말을 사용할때마다 “입양인” 이란 말을 사용한다.    이말역시 쉽게 나오지 않는다.   때때로 어떻게  내 자신에 대하여 아직도 잘 설명할지 모르는나 자신이기에  나의 어린아이같은 것들을 다 버렸는지 의문이다.

 

수요일이라면어떨까?

수요일이라면어떨까?

만약 당신이 입양과정에서 한가지만 바꿀수 있다면?  하나만.  그게 무엇일까요?

난 거의 포기하려고 했었다.  진심으로.   난 나의 블로그를 어떻게 써야할지 아직도 알아내는 중인데, 꽤많은  훌륭한 저술가들, 입양에 관한  무수한 문제에 대해 훨씬 더 잘 설명하고, 대변하는  아주 대단한 blogs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어떤것을 제시할것인가?   고객과의 면담 활동시간처럼, 난 나 자신에게 묻는다, 어떻게 도와줄수 있을까?   우리가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할것인가?  그리고,  난 어제, 그들자신들의 이유로 나의 글들을 읽고,  생각을 나누며,  이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느끼는 사람들로 부터,  아주 개인적인   3개의 이메일을 받고 일어났다.   난 다시 힘을 얻었다.  우린 모두 감사하고, 인정받는것이 필요하다, 동의하시죠?

자 시작합니다….거기 계신분들은 누구십니까?  내 생각은 무작위로 아무 수요일에 질문을 해서, 대화로 출발해 시작하려고 했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지역 공동체의 조직자로서의 임무가 제일 우선이라는 것이다.    지난 마지막 대통령 선거 주기로 인해 별로 좋지않은 말들이 떠도는 것을 안다.   그러나 입양은 늘 지역사회, 가족의 명확한  의미로서의 확장이며, 우리가 가정이라고 부르는 선택한 구룹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대답은 이렇다.   만약 내가 입양수속 과정에서 딱 한가지만 고칠수 있다면, 그것은 장래 입양부모가 되려는 부모와 더 자세한 밀도있는 인터뷰를 하는것이다.   정말 쉽고 간단한 답이다.   그러나  난 AAI 를 나의 선택의 도구로서 사용하려한다 – Adult Attachment Inventory.   이것이 어떤 실체적인 방법으로 유대관계의 내력에 관하여 직접 대화할 수 있게 유도하고, 또 미래의 입양자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확실하게 이야기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하나의 예가 있다 – 재미로 보세요 –  http://www.web-research-design.net/cgi-bin/crq/crq.pl

 

 

 

 

9월의어느날

Polldaddy poll (인기있는 on line 설문 software) = 5484112]

어째서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해야하는지?  자,  나는 곧  한국의 대통령앞에 서 있어야할 것이며, 내가 입양된것에 대하여 또 입양의 현 상황에 대하여 3분간 무엇이든 이야기를 해야될것이다.   한국말로!

난 내가 무슨말을 하고싶은것에 대하여 걱정하고 신경이 쓰이는것이 아니라, 정말 흥분되고 영광이다.  가장 중요한것이 날 힘들게 하는것이 아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의 한국어는 정식으로 배운것이 아니다.   나는 한국말을 자연스럽게 조금씩 배웠지만, 정식으로 책을 보고 배운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해야할 말들을 기억해야만 했다.   다른 나라의 최고 수뇌앞에서 바보처럼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난 무엇이든 내가 하고싶은말을 다 할 수 있을만큼 귀엽지도 않다.   둘째로, 난 그들에게 안전상의 목적으로 나의 사진을 보내야 한다.   엄청나게 많은 나의 사진을 찬찬히 살핀후, 하나를 찾았다!   남편과 함게찍은 사진이다.  별로 좋지않은것 같다.  그래서, 난 샤워를 급하게 마치고,  아들을 시켜 전화기로 사진을 찍게하여 보냈다.  애처로운 감상적 연민이다!   왜 전문인들이 얼굴만 찍어두는지 지금 알것같다.   난 말그대로 어색한 염색과 퍼머로 피곤한 아줌마 같아보였다!

진정으로, 여러분이 무어라고 말할지 듣고싶다.  어떤 “sending country”의 지도자앞에 설수 있는 기회를 갖는것이 일생에 한번 있을까하는 기회다.   여러분은 이런 기회을 어떻게 사용하실 겁니까?

나의 연설을  정리하는 작업중이다.  곧 이것이 일반 공공 국민에게 들려줄 준비가 되는대로 post에 게시하겠다.

PS –한 친구로 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 “난 한국말 배우는 것을 포기하려고 생각중인, 한국에서 입양된 친구와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당신이 대통령을 만날거라는  뉴스를 알려주었는데, 그는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꿨다!  경외로운 대단한 일이다!”

Fernanda 찾기

http://findingfernanda.com/2011/08/breaking-update-in-the-karen-abigail-case/

웹 링크를 첨가하는 나의 나약한 방법을 용서하세요.   그러나 이것을  회람으로 서로 돌려보지 않기엔  너무 중요한 것이다.

국제입양의 영구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모두 자신들만의 독특한 감정을 갖고 있음을 안다.   이 논쟁은 긴 역사는 갖고있고, 영원히 끊임없이 계속되리라 확신한다.   내가 보는 견해는, “비록 어떠한 금액”을 치루더라도 아이를 입양하고 데려올수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 어떠한 비용이 들더라도” 아이들을 자국에 보호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다.   난 이 두그룹이 서로 함께 단 한번도 의견의 일치를 본적이 없음을 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난 정말로 많은 의문에 싸이고, 어느쪽을 편을든다.   이것이 몇주전에 내가 쓴것과 일치한다.   “Once upon a time” 인데, 이것은 항상 소망으로 시작되고, 그소망을 어떻게 이루어내고, 그러므로 모든것이 달라질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동향사람들로부터 동정을 얻으려고 갈망하는 birthmothers를 보면 정말 나의 가슴이 무너진다.   확실히, 이것은 정말 너무 큰 댓가를 치룬다.

짐작했겠지만, 나의 가까운 명단의 친구들과는 대화를 해오고 있다.  우리의 이메일에서 어떤결과가 나와 주고 받는가 하면, 이것이  birthmothers들이 그들의 안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진술하고 설명하는나라들 – 많은 나라들중 몇몇을 들자면  Nepal, Vietnam, Ethiopia 등은 다른 나라들에 막대한 밀접한 관계를 주고 있다.   이것은 역시 우리 입양인들에게도 이 입양의 세계에서 일을 하든 안하든, 무엇인가 해야함을 요구하며,  우리가 인종과 입양에 관하여 이야기할때도 단지 입양의 과정에서 안전하게하려는 보호차원을 떠나 확실히 도와주어야할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아이들의 가장 최선의 이해관계와 관심사를 찾는것이지, 입양을 돕는 기관으로서 아이들에게 무엇이 좋은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것이 아니다.

 

입양의 세계에서 입양인/사회복지사/상담치료사 로서 일하면서 들을 수 있는 20 OMG 논평들:

나의 posts의 대부분은 사실상 개인적인것이다.   그러나  이 입양관련 분야에서  나는 여러개의 역활을 갖고 있는  관계로 전혀 당치도 않은 논평들과 질문들을 야기시킨다.   외롭지 않으려고,  난 나의 “LIST”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의 여자친구들과 토론할때,  우리의 입양 신분이나 상태가 얼마나 많이,  이분야에서 함께 일하는 전문적인 동료들로서  우리가 유일하게 이야기하는 단일 주제임을 알고 우리는 정말 놀랐다; 우리가 쓰는 서류작업도 아니고, 우리가 하는 프레젠테이션들도 아니고, 또 실질적 실무에 관해서도 토론하지 않는다.  난  이것을 이해한다.   입양되었다는것이 우리가 하는일에  절대 필요한 것임을, 또 이것은우리 대부분 모두 최선을 다해 우리의 일을 해내고 있음을 느끼고 반영할 수 있는 척도이지만, 이러한 논평들은  일반적으로   “교육,  임상 실무코스와 실무경험의  햇수를” 감소시키는  경향을 초래한다  (SBA and MS).

자, 보십시요:

1 – “ 당신의 핸섬한 남편이 있는 집에 가서 와인을 마시며 이 모든것을 잊어버려라” – 입양하려던 가족이 아이 입양을 취하하고,  나의 homestudy 서류도 갖고갔으며, 다른 입양기관에 $10,000를 지불한것을 알고, 국제입양기관의 디렉터가 한 코멘트.   난 중앙 당국에 그들이  그 나라를 떠나지 못하게 해달라고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2 – “ 난 나의 인도 고아 딸이 너무 자랑스럽다” – 사회복지사며, 입양부모가 JCICS를 위한 갈라디너에서.

3 – “당신이 입양된것이 이 일을 하는데 당신이 뭔가 다르게 잘한다,  좀더 개인적인 감정을  부여한다” –사회복지사

4 – “왜 한국이 이 가정에 아이를 입양하지 않으려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장래의 입양엄마가 우울증약을 복용) … 한국이 약물에 관한 그들의 전망을 고쳐야할 필요가 있다”  – 사회복지사

5 – “베트남의 입양인들이 가장 감사하고, 한국입양인들이 가장 마지막이다.    그들은 U-Haul을 운전하는것을 겁내지도 않고, 그들이 원하는것은 무엇이든 가져가고, 당신이 사는곳에서 얼마안떨어진 곳으로 이사하는데, 그들로 부터 당신은  절대로 다시 소식을 듣지 못할 것이다”. – 전 상임이사 이며, 입양기관 설립자.

6 – “이아이는  감옥에,  이 애는 15살에 아이를 낳고, 이놈은 재활치료를 갔었고…” – 상담치료사/입양부모가 그녀의 목걸이에 달린 아이들의 장식을 설명하며 한코멘트.

7 – “이번 Hague 컨벤션이 통과되면 난 어떻게 하나… 아마 비지니스를 페업해야될것 같군.  난 기준합격신용을 얻을 수 없어!” – 에이전시 디렉터

8 – “입양인들이 어떤지 난 알아, 입양인과 데이트를 해보았거든…”  국제입양 프로그램의 디렉터이며, 사회복지사

9 – “당신은 더불 보너스야:  Latino 이며, 입양인이니까!”  – 입양후 상담기관

10 – “당신은 대단한 치료사입니다, 왜냐면 당신이 입양인이니까!” – 동료 치료사

11 – “당신은 그들(입양부 모)에게 떠도는 모든 거부적인 이야기들로 겁을 주지 마라.” – 국제입양기관에서 일하는 입양직원

12 – “우리(agency)는 아이 입양을 안한다 .” – 입양기관 직원, 입양하려던 가족이 아이의 출생국가에서 돌아온후, 떠남.                                                                                                                                        13 –“ 난 당신의 입양부모와 꼭 닮고 싶어.  그들은 분명 뭔가 올바르게 한것같아, 왜냐면  당신의 많은점이 잇슈를 갖고 있으니까”.  슬픔과 상실에 관한 presentation후,  컨퍼런스에서 입양부모

14 – “중국에서 온 나의 딸을 만나보셔야 해요.  내가 짐작컨데,  당신의 강연을 들은후, 당신에게서 많은것을 배운것 같아요,  왜냐면 그녀는 입양되었고,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거든요.  당신의 전화번호를 주실수 있나요?” – 입양부모/JCICS에서 presentation을 한 사회복지사

15 – “그녀가 그녀의 입양에 관한것을 너무많이 이문제에 관련시켜서.” –  사회 복지사가 homestudy를 부인한후  입양부모가 불평하다

16 – “그들은 방해할 좋은 이유를 갖고 있다.  그 아이가 처음부터 가족에 잘 맞질않았다” –  진행중인 입양이 취소되고, 다시 그 가족에게 다른입양을 승인하고 나서, 사회복지사/agency 직원

17 – “그녀는 정말 교묘히 조종하고, 전혀 고맙지 않다.   그들중 많은이가 그렇다 – 정말 이 과정을 계속 주시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 입양이 취소되는것을  마무리하며, 입양치료사

18 – “당신이 입양을 위해 외국에 나갔을때, 돈이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지 마라.  단지 이것이 의미하는바는 그들이 영원한 가족을  갖일 수 있는것임을 기억하라”.  – 장래의 입양부모들이 될 사람들 앞에서, 입양 모집자

19 – “당신이 이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정말 훌륭한 일이지요 – 당신의 인생이 이제 제자리에 다시온듯 충만한 삶이군요”.

20 – 이 마지막 것은 Susan Branco Alvarado 에게 외침니다…. 당신의 귀화서류가 도대체 어디있는것인지, 세상 모두가 의문이다… 당신 정말 합법적이야?

이 리스트가 끊임없이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안다…. 좋은것 갖고 있으면, 보내시요!

입양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난 더이상  성인 TV를 절대 낮시간에 시청하지 않는다.   여름동안 두명의 작은 아이들이 집에 있어서,  보는 것이 거의 Phineas and Ferb (Disney channel의 animated comedy-musical) 다.    오늘, 난 일찍일어나 가까이에서 하는 문화 캠프를 위한 workshop을 하기위해 일찍 나왔다.   부모님들은 픽업하기 하루전에 함께 모여서 이 캠프에 와서  인종, 정체성, 입양, 가족등에 관하여 생각하고, 이 워크샵에 오기원하는 이들을 모집한다.    난 이곳에 온것을 기쁘게 생각했지만,  이미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같은 얘기를 하는 격의 애석함을 느꼈다.

오늘 아침,  난 Good Morning America를 5분정도 보고, 또 3분정도 Today Show를 보았다.   두show 모두 내가  정확히 TV를 켰을때,  입양에 관하여 보도중이었다.    있음직한 어떤일이  결국 일어났는지?  처음의 얘기는,  불명예스러운 “ Hot Sauce Mom”  이다 –알라스카에 있는 이 엄마는 러시아에서 입양한 아이를 버릇을 고친다고 핫 소스와 차거운 물 샤워를 이용했다. http://abcnews.go.com/US/hot-sauce-mom-jessica-beagley-charged-child-abuse/story?id=12796871           두번째 이야기는  생부가 그의 아이 보호권을 놓고, 그의 여자친구는 이미 이 아이를 Utah주의 어느 가족에 이미 양도 되었다고 하는데,  아이 양육을 놓고 싸우는 보도였다. http://today.msnbc.msn.com/id/26184891/vp/44201943#44201943.

시인하건데, 난 입양이라는 말만 들어도 나의 모든 신경이, 에너지가 쏠린다.  이 것이 어쩔수 없고,  직업적인 본능의 운명이다.  보아야만 한다.   이런경우가 어쩌다 있는,  흔치않은 케이스인걸 알지만,  이런 이야기는 날 화나게 하고, 나의 친구들  “List” 로 이메일을 날리게 한다.    맨처음 생각은, 물론 부정적인 입양 이야기이여야 했다.   입양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 입양가족에서 일어나는 모든 좋은 일들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잠간, 그렇다 우리는 그런 좋은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인정하는데, 그런 이야기들이 날 역시 정말 화나게  만든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이 내게 문제인가?   다른 행복한 부모가  아이를 입양하려는  순간에,  누군가의 축제행렬에 왜 내가 비를 내릴려고 하고 있는지?  왜 이 입양이 합법적인가에 대한 의문과 이것이 과연 진실되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입양의 과정에서 다른 아이가 상처를 받았다는 것과, 다른사람에게 뭔가를 비난하려는 구실을 찾는 얘길 듣고 왜 내가 그렇게 화가 나는지?   이런것이 내게  많은 상관이 되는지,  보도기관에서 그들이 이런것을 묘사하길 “공정하게” 또 정확히 올바른 의미로 취급하고 있는지?   “전문가들”에 대해 의문을 갖고,  그들이  정말 진실한 말을 하는지에 대해,  내가 왜 문제를 삼는지?   도대체 난 누구란 말인가?

나도 정확한 답을 모른다, 하지만 이런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아이가 상처를 받을때, 이용당하고 학대당할때, 착취당하고,  평범하게 취급하지 않을때  난 정말 가슴이 아프다.   아마 실제는 입양한다는 것이 정말로 아주 의미심장한 것인데, 이것이 아주 잘못 되어질때, 또  부정확하게  묘사될때,  난 계속해서 마음이 부서지는 상처를 입는다.    아이들의 삶에서 가장 극도로 어려운 상황은 그/그녀가 성인의 올바른 판단, 가장 적절한 판단에 전적으로 좌우된다는 점이며,  그들이 자신들의 본분을 올바로 못했음을 알게되면, 이런것이 날 정말 화나게 만든다.

왜 내가 이러한 이야기들을 post에 올리는가?   경고주의적 이야기들로서?  사고력을 자극하여 무엇인가 진지하게 생각할 가치가 있어서?   변화를 요구하기 위해서?   이 모든것이 다 포함된다.